긴 생머리와 단발 머리

머리를 정말 잘랐다!

진짜 무서웠고 그래서 고민도 엄청 많이 했다. 무엇이 무서웠냐 하면, 지금도 못생겼는데 더 못생겨지면 어떡하지, 곱슬이 심한데 삼각김밥처럼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관리하기 어려우면 어떡하지, 아침마다 드라이하느라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는 것 아닐까, 더 자주 매직을 해야 해서 돈을 더 많이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이런 것들.

하지만 화장을 하나씩 없애나갈 때처럼, 브라를 벗어버렷을 때처럼, 이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라인을 하지 않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고, '눈화장은 버렸어도 비비크림 만큼은 발라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세상에나, 비비마저 바르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 브라를 벗어버렸을 때도 처음엔 두려웠지만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때를 생각하면서 용기를 냈고, 긴 머리에서 단발이 되어도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나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의자에 앉을 때 머리가 등이랑 등받이 사이에 낑기지 않고, 목 뒤가 시원해졌고, 달랑달랑한 가벼운 머리의 느낌이 좋을 뿐이다.

근 반 년동안 '조만간 머리를 잘라야겠다'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것은 온전히 want to가 아니라 have to도 함께 있었다. 긴 머리는 사회가 나에게 주입한 코르셋이니까. 긴 머리가 예쁘다고 생각한 것은 온전히 나의 취향이 아니고, 어렸을 때부터 당연히 긴 머리를 계속 가져온 것도 온전히 나의 선택이 아니니까. 하지만, '코르셋을 거부하겠다'는 이유로 머리를 자르면 그것은 온전한 나의 선택인가?

바깥 세상에서 여성이 긴 머리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듯, 페미니스트 세계에서는 숏컷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계속해서 느껴왔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하고 페미니즘 행사에 가면, 어디 지나가다가 구경 온 사람 쯤으로 생각하다가 내가 무언갈 자세히 물어보면 약간 놀라는 듯한 표정이 돌아온다든지, 참석자들 중에 긴 머리는 나밖에 없다든지, 아니면 아예 연사가 "우리 페미니스트들, 다들 머리 짧고 고양이 키우고 청바지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잖아요."라고 말한다든지. '나는 긴 머리에 고양이도 없는데 페미니스트가 아닌가?(좌절)' 생각하며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던 그 날의 기분은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정말 나의 의지로 머리를 자르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는 바깥 세상의 시선으로 인해 긴 머리를 했듯이 페미니스트 세계의 시선으로 인해 짧은 머리를 하고 싶어진 것인가? 그러면 긴 머리가 내 선택이 아니었듯이 내 짧은 머리도 선택이 아닌 것은 아닐까? 그런데 도대체 '온전한 내 선택'이란 뭐지? 그런 게 있을 수는 있는 건가? 끝없이 돌고 도는 생각의 흐름..

또 다른 고민도 있었다. 내가 단발을 하건 숏컷을 하건 어쨋건 그것은 여전히 ‘여자’의 머리 스타일일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코르셋이 아닌가? 그것은 여성성의 수행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말 코르셋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남자 머리처럼 귀 옆을 파고 투블럭을 해야 하나? 그러면 그것은 내가 코르셋을 벗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남성성을 따라하는 것인가? 내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모습을 버리고 가고자 하는 곳은 남성의 모습인가? 그것은 아닌데. 그러면 나는 왜 머리를 자르려 하지? 왜 머리를 잘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정말 내가 단발을 하면 이 코르셋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인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쨋든 여전히 '여성성'을 수행하고 있지만 나로서는 정말 큰 결심으로 머리를 뭉탱이로 잘라냈고 묘한 해방감 같은 것을 느낀다. 전희경 선생님의 지난 강연에서는 “긴 생머리가 정말 ‘선택’이러면 긴 생머리일 때의 사회의 반응과 삭발했을 때의 사회의 반응이 같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회의 반응은 같지 않으니 그것은 내 선택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단발했을 때의 사회의 반응과 삭발했을 때의 사회의 반응도 같지 않은데// 뭐 그런 고민은 여전히 있지만. 그래도 그 무거운 머리를 잘라내고 나니어떤 한 걸음을 걸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덧) 미용실에서의 일화.
(남자 보조쌤) “머리 이렇게 많이 자르면 몸무게 안 줄어들어요?(궁금)"
(미용사쌤) "고객님 집에 가서 체중 재봤는데 안 줄어들었으면 실망하실 텐데 왜 그래요~ ㅡ.ㅡ"
(남자 보조쌤) "아니.. 그게 아니라요~머리가 젖어서 그런가.. (옆에 있는 젖은 수건을 들면서) 아까 머리 쓸어담을 때 거의 이 느낌이었거든요. 머리가 거의 수건급."
체중은 이제 더 이상 나의 관심사가 아니니깐 잘 모르겠지만,, 이제부턴 목이 훨씬 덜 결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