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경 <정상이라는 환상 : 몸과 나이듦에 대한 여성주의적 탐색> 강연 후기

지난 4월 27일, 대전 여성주의 독립잡지 BOSHU가 기획한 강연 <정상이라는 환상 : 몸과 나이듦에 대한 여성주의적 탐색>을 들었다. 이 강연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듣는 것이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처음 듣는 것 마냥 새롭고 재미있었다.

작년에는 아픈 무릎과 씨름하고 있을 때여서 사회가 상상하고 요구하는 '장애가 없는 정상인 몸'과 내가 실체로서 끌어안고 사는 몸, 즉 '아프고 정상이 아닌, 거기다 심지어 여성인 몸'과 함께 어떻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을 하며 들었었는데, 올해 같은 내용의 강연에서는 '젠더 수행성'에 꽂혀서 들었고, 그에 대해 후기를 적어보려 한다.

강연은 "여성주의는 무엇을 질문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여성주의는 어떤 과정에서 사회가 구체적인 개인들을 <여성>으로 규범화하는지,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또 <여성>이라는 범주는 무엇인지를 질문한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그 모습은 사회가 나에게 요구한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희경 선생님은 '젠더'는 '동사'라고 하셨다. '여성성' 또는 '여성스러운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 '여성성'을 '수행'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규범이 아주 촘촘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너무나 튼튼하게 이 사회에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 '여성성'의 금을 밟아 넘어보지 않고서는 그런 규범이 있었는지 잘 눈치채지 못한다. 사회가 나에게 그어준 금 안에 예쁘고 얌전하게 머무른다면 그 규범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금 밖을 나오는 순간 사회가 나를 어떻게 다르게 대하는지 아주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긴 생머리를 하고 있을 때에는 지옥철에서 끊임없는 성추행에 시달려야 했던 반면, 삭발을 하고 나자 지하철에서 남자들이 자신을 보고 흠칫 놀라며 거리를 둬서 자기를 둘러싼 어떤 결계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하는 지인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선생님 자신의 이십대 시절 짧은 스포츠머리를 했을 때와, 사십대 시절 긴 머리를 했을 때의 경험도 이야기했다. 두 모습 다 사회가 생각하는 '정상의 여성'의 모습과는 다르다. 짧은 커트머리를 하면 "실연했나봐", "머리 좀 길러보지 어때?", "남자친구한테 허락은 받았어?" 등등의 수많은 이상한 코멘트를 듣게 된다. 하지만 긴 생머리를 하고 있을 때는 "무슨 일 있어? 실연?"이라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그 긴 생머리를 하는 데에 남자친구의 허락을 받았는지 물어보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동사로서의 젠더'에는 이런 스타일 뿐만 아니라 아주 미묘한, 그렇지만 우리 각자의 몸에 아주 뿌리 깊게 배어있는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와 말투, 목소리 등도 포함된다. 남자는 사람이고 여자는 여자인 이 사회에서, 남성의 몸은 보편을 대표하지만 여성의 몸은 남성과 다른 특성 - 재생산과 몸의 굴곡(예쁜 몸) - 을 통해서만 규정된다. 그러므로 굴곡이 있고 예쁘게 마른 몸만이 정상적인 여성의 몸으로 여겨진다. 강연에서 다뤘던 다이어트, 성형 등을 통한 몸의 관리 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가져야 특정한 몸짓들을 통한 젠더 수행이 있고, 그것은 훨씬 더 미묘해서 스스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다리를 오므리고 앉아야 한다, 같은 것들은 그 중에서도 비교적 알아차리기 쉬운 여성의 몸짓이일 것 같고, 긴 생머리를 조신하게(!) 귀 뒤로 넘기는 동작,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는 동작, 굽이 있는 (여성용) 구두를 신었을 때만 나오는 걸음걸이, 자신보다 큰 상대를 바라보며 귀여워 보이게 말하는 그런 어떤 몸짓들.. 이런 것들이 여성들만 가지는, 그렇지만 너무 당연하고 미묘해서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사로서의 젠더'에 포함되는 몸 움직임이 있다.

그렇다면 몸 움직임만 있을까, 목소리와 말투도 있다. 여자여서 가지게 된 어떤 말투들, 그리고 대화방법들이 우리 몸에는 아주 깊숙이 배어있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아 진짜요?", "우와~", "오 그렇구나" 등등의 말을 엄청 자주하는데, 이런 말들은 대화상대가 남성인 경우 아주 많은 경우에 맨스플레인을 유도하는 쪽으로 작용하고, 그들이 실제로 멋있거나 대단하지 않음에도 무언가 대단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여자들끼리 대화할 때는 서로가 이렇게 말하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더더욱 재밌게 얘기하게 되지만, 내가 남자와 대화할 때 나는 이 문제를 계속 느끼게 되고 스스로 엄청 짜증이 난다. 그렇지만 나는 대학에 온 이후인 지난 6년간, 아니 내 평생동안 이런 말투를 계속 가져왔기 때문에 어떻게 다르게 말해야 할 지 모른다. 특히나 상대방과의 관계가 편하지 않은, 긴장되는 관계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런 특정 발화 뿐 아니라 말끝을 뭉개는 말투나 콧소리를 내는 말투 같이 애교로 여겨지는 말투들도 있다. 머리는 자르면 되고, 화장도 안 하면 되고, 브라도 벗으면 되지만,(이렇게 하는 게 간단하고 쉽다는 말이 아니라, 분명 어렵고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지만 적어도 이것들은 어떻게 하면 사회로부터 주어진 '금'에 도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은 명확하게 보인다는 말이다) 이런 미묘한 몸짓과 말투는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너무 어렵고 고민이 된다.

내 안에 배어있는 여성성을 수행하기 위한 몸짓과 말투를 벗어버리고 싶다. 내 몸에 씌워져있는 모든 "여성스러운 것"을 없애버리고 싶다. 그렇지만 선생님도 어제 하신 말씀 - "그렇게 모든 젠더 수행을 거부하게 되면 우리는 내일부터 아무 옷도 입지 않아야 해요." - 처럼 모든 걸 거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답도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긴 생머리를 했을 때와 삭발을 했을 때의 사회'의 반응이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긴 생머리는 자기 만족이고, 내 취향이자 내가 선택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전희경 선생님은 그런 문제의식을 계속 가지고 마음 속 불편한 줄타기를 끊임없이 해나가는 것, 그리고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사회가 만들어준 금을 넘는 일이 사실은 별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씩 해보게 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답변을 주셨다. 그렇지만 이 불편한 줄타기 정말이지 너무 불편하고 힘들다.

쇼핑몰에서 마음에 드는 블라우스가 분홍생가 연두색이 있을 때 , 평소 좋아했던 분홍색이 아닌 연두색을 고르고는 뿌듯해하다가도 '이게 뿌듯할 일이 맞는지' 고민하는 일. 원피스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나를 스스로 나무라면서 "보이시한 핏"이라고 소개된 남방을 대신 선택하는 일. 그러면서도 "보이시한 핏"의 옷을 입는 게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게 아닌데! 하는 고민도 동시에 하는 일. 가슴 아래까지 오는 긴 머리에 트리트먼트니 에센스니 온갖 화장품을 바르면서 '이 머리는 도대체 언제 자를 수 있을까' 한숨 쉬는 일. 그러면서도 거울 속 긴 생머리를 한 내 모습을 마음에 들어하고, 또 동시에 긴 생머리 코르셋에 아직도 갇혀있다며 스스로를 비판하는 일. 내 몸에 배어있는 여성스러운 몸짓과 말투를 발견하고 불편해 하는 일.

이런 거 다 너무 그만하고 싶다. 여자로 태어난 거 너무 짜증나고 억울하고. 그치만 뭐 어쩌겠나. 계속 고민하고 하나씩 금을 밟아보고 그러면서 살아야지. 우선 이번 여름은 다리털을 깎지 않기로 다짐했고 오늘 처음으로 스타킹 안 신고 다리털 부숭부숭한 맨 다리로 반바지 입고 나왔다. 그리고 긴 머리를 자르기 위한, 숏컷을 해보기 위한 용기를 온 우주에서부터 끌어모으고 있다(벌써 몇 개월째). 언젠간 잘라볼 수 있겠지. 뭐, 그러면서 살아야지. 그렇게 젠더 수행의 금을 밟아보고 넘어보고 도전하고 부수려고 노력하다보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야지...

강연은 "몸과 정상성"이 주제였지만 그 중 세부주제로 다룬 "젠더 수행"에 꽂혀서 작성해본 후기였다. 그러니까 여러분 제게 숏컷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워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