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4장,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이서영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이다

저자는 밸러리 솔래너스가 1967년 발표한 선언문인<남성들을 거세하는 사회를 위해 Society for Cutting up Men(SCUM)>을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인간 쓰레기’라는 뜻을 가진 ‘scum’을 제목으로 하는 이 선언문은 남성을 타인에게 공감할 능력은 눈곱만큼도 없고, 반송장처럼 반응 없는 멍청이이며, 유인원보다도 한참 열등하다고 묘사한다. 남성들을 “걸어다니는 딜도"와 다를 바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무가치한 자아 밑바닥에서 자라난 비이성적이고 무차별적인 증오 때문에 쓸데없는 폭력으로 성적 흥분을 얻고자 한다."고 평가한다.

솔래너스의 이 선언문은 사회가 여성들에게 부당하게 투사해온 ‘나쁜 특성들’을 그대로 남성들에게 전가시킨 것이다. 여성들은 훌륭한 특성들을 가졌어도 사회적 맥락에 의해 평가절하당하는 경험을 겪는다. 이것은 “감히 여자가"라는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가해자는 자신의 범행 동기를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진술했다. 여기에는 ‘조차’라는 보조사가 생략되어 있다. 이 언술에는 ‘나’로 지칭되는 사회 보편의 존재인 남성을 반드시 존중해야만 하는 더 약하고 더 열등한 집단으로서의 여성을 전제하고 있다. 여성은 더 낮은 위치에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통념이 깔려있는 사회에서 여성의 ‘논리적임’은 ‘까칠함’이 되고, ‘다정함’은 ‘꼬리침’이 되며, ‘정당함’은 ‘예민함’이 되고, ‘용기 있음’은 ‘드셈’이 된다, 여성들의 특질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여자들이 더 똑부러진다.", “그래도 여자들이 정신연령이 더 높고 어른스럽지."와 같은 말에 담겨있는 어떤 특정한 기대치를 수행해야 한다. “그래도 여자가"와 “감히 여자가"는 서로를 끊임없이 북돋우면서 여성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나간다. 페미니즘은 “그래도"와 “감히"를 뚫고 나가야 하며, 남성이라는 위험한 존재를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

남성은 여성에게 위험하다. 강력 범죄의 여성 피해자는 85퍼센트에 달하고, 가해자의 비율은 96.3퍼센트로 남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저자는, 남성이 이토록 여성에게 위험한 존재라면 남성과 여성에게 확고한 분리를 요구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필요한 일이 될 수도 있지는 않는지 반문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어서 여성과 남성이 서로 끈끈하게 묶여 있는 정서적, 경제적 결속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떤 여성들은 당면한 현실 앞에서 남성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일례로, 여성의 이혼율은 여성의 소득, 자신의 경제적 자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성의 고용지위가 불안정하고 성별 임금격차가 뚜렷한 사회에서, 여성은 이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같은 계급운동의 예를 들면, 계급의 위치에서 싸워야 할 상황에서 여성들은 젠더 때문에 이중적 억압을 겪고, 결국 어느 쪽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그런 경험을 한 여성들은 여성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기도 했다. 일상적 영역에서 자신을 대변하는 사람이 남성일 때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여성들은 가부장주의와 교섭을 한다.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은 직군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더욱 그랬다. 저자는 자신이 노동조합 간부로 일했던 시절, 자신은 여자였기 때문에 간부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남성 위원장의 권위를 빌려야 했던 경험을 서술한다.

여성은 남성과 비대칭적인 연대를 맺음으로써 가장 필수적인 것들을 얻는다. 노동 현장에서 몰려나지 않는 것과 거기에서 비롯하는 최소한의 삶이 그것이다. 때로는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동시에 이것은 여성이 억압받는 사회적 환경을 고착화시키고, 자신을 종속시키는 권위에 공모하는 결과를 낳는다.

인터넷 상에서는, 이렇게 가부장제에 복무하는 여성을 “명예남성"이라고 부르며 비난한다. 하지만 일거에 남성을 소거하고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많은 차원에서 여성들은 남성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유대 관계의 해체는 개별적 여성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누구에게도 그런 위험이 강요되어서는 안 되기에 남성과 여성의 분리를 전제로 한 주장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우리는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 자신을 억압하는 권위와 결탁하는, 스스로의 발목을 묶는 전략적 선택에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만 여성들의 삶을 바꾸는 운동에 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떤 ‘페미니즘’을 지지할 수 있을까 &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감히 여자가!"를 외치는 수많은 남성들은 단순히 가부장제의 수혜자를 넘어서 구체적인 억압자로 기능한다. 그런데 흔히 “맨박스"로 불리는, 남성들이 가부장제 하에서 겪는 고통과 어려움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남성이 고통받는 이유는 바로 여성 억압이다. ‘그깟’ 여자와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남성들이 저항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방식은 여전히 남성성을 강조하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가부장주의를 거부하는 남성들이다. 이들은 가부장이라는 위치가 주는 여러 이점들은 포기하지도 않고 질문하지도 않으면서, 여성들에게 억압의 반대급부로 주어졌던 것들을 특권으로 인식하고 박탈감을 느낀다. 똑같은 일을 하고서 ‘남자이기 때문에’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라보지 않고 왜 남성이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야 하냐며 ‘김치녀, 된장녀’인 여성들에게 분노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의 틀에서 페미니즘은 정말 끔찍한 것이다. 이들은 페미니즘을 통해 자신에게 강요되던 것들(‘진짜 남자’가 되는 것, ‘가부장’이 되는 것)을 완전히 폐기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여성을 동지로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들은 박탈감에 겹겹이 쌓여 있는데, 저자는 이런 박탈감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는 데에 해를 줄 만큼 공동체에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애초부터 남성들이 박탈감이라는 구시대의 유물을 끌어안고 여성들에 대한 분노를 표하지 않았더라면, 여성들 또한 분노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 여성들의 분노가 공동체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점만을 언급하는 것은 조금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데올로기는 어느 집단에게만 선별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여성 억압은 여성과 남성, 그 외의 모든 성별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시스템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내부에는 성차별적 인식이 존재한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아주 많은 여성들이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부역자’로 살아왔다.

이런 ‘부역자’ 여성들은 상냥한 선배 언니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세상을 모르고 괜히 힘들게 저항하지 말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여자로서’ 살라고 조언한다. 이들은 시스템의 입장에서 세상을 파악하며 여성의 성 역할이 당연한 것이라고 인지한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을 체화함으로써 살아남았다. 그랬기에 그들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조언은 진심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완결되고 닫힌 세계가 아니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서로의 것을 빼앗아서 자신의 몫을 지켜야 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같이 불평등한 지형을 공정하게 만드는 방법은 남성이 누리던 특권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특권을 나눠가지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을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일부만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가 가지게 하자는 것이 곧 ‘특권 철폐’가 아닌지..)

지금과 같이 성차별이 공고한 세상이 만들어진 데에 “평범하고 착한 남성들"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적대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 뿐이다. 함께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남성은 여성의 동지가 될 수 있다. 서로가 동지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에야 여성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억압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제야 남성들이 실제로 박탈당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나가는 과정도 촉발될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벽은 공고하다. 한쪽에서만 두드려서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억압의 벽을 무너뜨려야만 박탈당한 것들을 되찾을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은 이 이데올로기를 함께 무너뜨려야만 한다.


“그래도 감히" 함께 살아남는 페미니즘을 말한다

다시 선언문으로 돌아가서, 남성은 위험하고 거칠며 사악하고 하찮기 그지없다는 문학적 외침은 여성이 억압받을 이유가 조금도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여성이 억압받지 않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방법은 비유적으로라도 그렇게 “남성을 살려두지 않는" 방법밖에 없는 것인지 고민한다.

여성들은 지금까지 ‘여성주의’의 이름 아래 “인류의 절반"을 지우지 말라고 당당하게 말해왔다. 하지만 그 “인류의 절반"으로 일컬어지는 여성들은 서로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올바르지 않은 커다란 세상 속에서 여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살 길을 도모하는 노력은, 여성들이 존재하는 세상만큼 올바르지 않기 쉽다. ‘여성’은 단순히 피해자의 이름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주체의 이름이다. 그렇기에 여성은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다층적인 존재로 살아온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이 선택해왔던 다층적인 삶의 결들을 다시 살피고 그 안에서 타자로서의 자신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 안에서 힘을 얻고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 싸워 나가야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고, 그 사회구조에 어울리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새로운 사회구조는 억압과 차별이 여러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누리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남아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동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더 많은 동지를 만들기 위해서 현재는 나에게 ‘적’과 같이 작용하는 사람(가부장제와 결탁한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걸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뤄낼 수 있을지.. 타인과 경험을 나누고 그 다층적인 경험을 나누는 것은 굉장히 큰 애정과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데, 각자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그 에너지를 어디에 얼만큼씩 쓸 것인가를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