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뮤지컬 <모던걸 백년사> 후기

((( 너무 길어져서 네 줄 요약
- 페미니즘 뮤지컬 보고 왔다 (https://tumblbug.com/musicalmoderngirl)
- <페미니즘 뮤지컬>로서의 의미 너무 좋고, 중심 주제도 좋다
- 그런데 다된 페미뮤지컬에 이성애중심주의 뿌리기가 왠말??
- 명예남성이랑 페미니스트 대비하는 것도 별로 )))

(끝부분에 어밴져스 인피니티워에 나오는 내용 예시로 언급한 게 있는데 스포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음)

몇달 전, 텀블벅을 통해 페미니즘 뮤지컬을 기획하는 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중간고사가 딱 끝난 이후인 4월 중순~말이어서 고민 없이 펀딩하고 지지난주 주말 보고 왔다. (그러니까 이 후기는, 뮤지컬 보고 나서 2주나 지난 뒤에야 쓰는 글..)

몇 가지 부족한 점은 있었지만, 우선 지금과 같은 때에 페미니즘 뮤지컬이 대학로 무대에 섰다는 것의 의미부터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이게 가능했다는 것의 의미. 문화예술계는 작년 #00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서부터 올해 미투운동에까지, 성폭력 고발이 가장 활발했던 분야 중 하나다. 어떤 이들은 미투 고발이 활발히 나오는 분야가 특별히 성폭력이 많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그 분야들이 어떤 이유로든 폭로가 가능한 분위기이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쨋든 그렇게 터져나오기까지는 그 모든 고발자들을 어떤 임계점에 닿아서 터지게 만든 만연한 성폭력과 남성중심적인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성폭력 성추행 강간이 만연했던 문화예술계인데, 그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적어도 공연계에서는) 대학로에서 <페미니즘>을 간판에 달고 있는 뮤지컬을 무대에 올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하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뮤지컬을 보면서 '이 배우들은 어떻게 섭외했을까? 섭외는 쉬웠을까? 의미있는 뮤지컬이니 모두 하고 싶어했을까? 그렇지만 저 배우들은 무섭지 않을까? 앞으로 이 시장에서 >메갈년< 낙인이 찍혀 사장될 걱정이 되지는 않을까? 오히려 문화예술계 젊은층 사이에서는 깨어있는 페미니스트가 주류일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머리 속을 맴돌았다.

마지막에 두 주연 배우가 손잡고 나오면서, 번갈아 스포트라이트를 나누면서 인사를 한 뒤 서로를 꼭 껴안는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 두 주연 배우가 모두 여성이다. 저 둘이 사이좋게 순서대로 서로에게 박수갈채를 바친다. 저 둘이 서로 껴안으며 이 페미니즘 뮤지컬의 성공적인 공연을 축하한다.... 가슴 벅찬 장면이었다.

이 뮤지컬의 중심 주제는 "100년전의 모던걸이나, 지금의 김치녀나 같은 모습의 여성억압이다. 이 둘은 완벽한 평행이론을 이룬다."는 것이다. 1918년 동경에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인형의 집>을 번역하는 경희는 "조선 최고의 시-끄 걸, 모던 걸"로 불렸고, 2018년 똑부러지게 스펙을 쌓아 자기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싶은 화영은 "김치녀"로 불린다.

(경희가 처한 상황) 감히 여자가 남자들보다 똑똑해서 동경 유학을 다녀와? 감히 여자가 어디 신문에 사설을 써? 감히 여자가 어디 책 번역을 해? 감히 여자가 결혼을 안해?
(화영이 처한 상황) 감히 여자가 남자들보다 똑똑해서 남자부장의 의견에 첨언을 해? 감히 여자가 술을 따르라는데 안따라? 감히 여자가 페미니즘을 소재로 한 출판을 한다고?

1918년의 경희가 겪는 일, 듣는 말들은 2018년의 화영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겪는 일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 사회가 똑똑한 여성, 주체적인 여성, 자신이 보지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을 어떻게 억압해왔는지, 그리고 그 억압하는 방식이 얼마나 일관되게 지속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무대 앞에 경희와 화영이 서 있고, 조명이 번갈아 가며 그들을 비추고 노래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뒤쪽에는 앙상블 배우 네 명이 서서 이들을 씹는 대사와 노래를 했다. 그 장면에서 앙상블 배우들은 경희의 순서에서는 베레모를 쓰고 있다가 화영의 순서가 되면 의상 그대로, 서 있는 자리도 그대로이나 그저 한바퀴 쓱 돌면서 쓰고 있던 베레모(1918년 암시)를 벗고 선글라스(2018년 암시)를 쓴다. 이게 되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100년 전과 지금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 그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베레모와 선글라스만이 있을 뿐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하이퍼리얼리즘 가사와 내용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셀 수 없이 많은 차별들을 작품 곳곳에 녹여내려고 많이 노력했다고 느껴졌다. 그런 면에서 <82년생 김지영>이 생각났다. 두 번째 곡은 화영과 다른 여성 배우들이 면접을 보는 상황이었는데, 화영이 "학점은 4점대, 복수전공, 토익은 900점대, 제 2외국어는 중국어. 이런 나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저는 잘 할 수 있어요!"라고 하는 찰나 남자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와서 "그래서 화영씨, 남자친구는 있어요? 결혼은? 애는?"이라고 물어보는데 내가 지금까지 수없이 겪은 일, 그리고 앞으로 수없이 겪을 일이어서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아연실색한 화영의 표정이 더해지면서 나는 두번째 곡에서 울고 말았다. (ㅠㅠ) 소극장이라서 숨죽여 쏟아지는 눈물을 수습하느라 정신 없았고 정말 너무 슬펐다. 그 외에 기억에 남는 장면은 화영이 슈퍼 심부름 시키는 엄마에게 왜 오빠는 냅두고 자기한테만 시키냐고 하자 "넌 그렇게 나를 도와주기가 싫으니!!! 딸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하는 것. 나도 맨날 겪는 일이어서, 그저 지나가는 장면이었지만 너무 공감했고 기억에 남는다. "착한 딸"로서의 역할을 요구하고 조금이라도 그를 거부하면 "못된 딸"이 되는 것...

<페미니즘 뮤지컬>이라는 것만으로 대견하다 칭찬 와방지게 해주고 싶지만 비판하고 싶은 점들도 있다. 아주 크리티컬한 결점이기도 하다.

첫째, 뜬금없는 이성애중심주의 쓰까넣기. 경희와 화영 둘 다에게 전체 스토리라인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필요없는 러브라인이 들어가있다. 경희가 번역해서 책을 출간하고, 화영이 그 책을 재조명하는 독립출판을 하는 데 있어서 남자들은 아무런 영향도 도움도 주지 못하는 데 굳이 그 부분들을 넣었어야 했을까. 특히, 화영은 갑자기 직장 동기인 상국과 손잡고 "당신과 함께라면 나는 다 버틸 수 있어!"라는 노래를 부르고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라고 말한 뒤 부끄러운 듯 무대 뒤로 뛰어들어간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힌숨이 터져나왔다. 아니 잘 나가다가 갑자기 왠 "우리 오늘부터 1일"? 그리고 '당신과 함께라면 나는 다 버틸 수 있다'는 말도 완전 거짓말이다. 그 '당신'이라는 사람은 남자이기 때문에 내가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사람은 남자이기 때문에 설사 내가 겪는 고통과 차별에 심정적으론 공감한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직장에서 잘려서 경력단절 되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일 것이다. 전혀, 아무 것도 괜찮지 않다. 사랑하는 당신이 있든 없든 나는 이 공고한 성차별이 벅차고 힘들다. 버티지 못하겠다.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뮤지컬에 이 무슨 말같지도 않은 대사가?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경희의 경우에도 뜬금없는 러브라인이어서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결국 질척거리면서 이기적인 구애를 하는 남자와 함께하기보다는 그 남자를 뿌리치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가는 선택을 한다. 이 경우에는 그래도 경희가 남자/연애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이 주체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기에 의미가 있었다.

반면에 갑자기 손잡고 1일이라 외치던 화영의 경우는 정말이지 이마짚, 그 뿐이었다. 그 남자친구라는 사람은 직장에서 화영이 부장에게 "페미니즘 출간이라니,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하냐. 사람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한다."며 화영의 능력을 후려치기 할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화영이 사내 게시판에서 온갖 모함을 당하고 잘근잘근 씹힐 때에도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페미니스트 동료여성을 지지하는 남성과 페미니스트 여성간의 관계는 연인 관계만 가능한 게 아니다. 그저 친구로, 좋은 동료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연인이 아니라 친구여도 작품 내의 남자친구보다는 더 큰 도움을 주고도 남았을 것 같다.

또한, 페미니스트 여성을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성애 대상이 되는 남성뿐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화영의 (여성)친구가 더 많이 등장해서 그를 응원하고 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둘째, "개념녀/명예남성"과 "페미니스트/각성한 여성"을 계속해서 대비하는데, 이런 이분법적인 구도는 너무 단선적이다. 경희 옆에는 "우리 남편은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한번도 때린 적이 없어. 그는 조선 최고의 자상한 남자. 나는 그의 종달새."라고 노래 부르는 친구가 있다. 화영의 옆에는 "아유, 화영씨가 좀 참아. 원래 다 그런 거야."라고 말하며 부장의 만행을 웃고 넘기는 여자 상사가 있다. 이들과 경희/화영을 계속해서 대조한다. 이 작품은 이들을 대비함으로써 아직 코르셋에 갇혀있는 여성들에게 경종을 울리려 했던 것일까? 이런 이분법적인 대조 구도를 통해 무엇을 원했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각 여성들을 "명예남성"과 "각성한 페미니스트", 이 두 그룹으로 딱 나눌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어떤 부분에서는 여전히 코르셋 낭낭한 명예남성이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각성한 페미니스트이지 않은가? 남편의 종달새가 될 거라고 노래부르는 여성이라고 해서, 자신이 겪고 있는 가사노동/시집살이/남편내조 의 부당함을 전혀 모르고 있을까? 그냥 웃어 넘기라고 말하는 화영의 상사는, 그게 틀린 줄 몰라서 그냥 웃어 넘기며 그때까지 살아남은 것인가?

틀렸다는 것을 알아도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경희는 자신의 친구에게 이혼하라고 하지만 친구는 "나는 너처럼 배운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남편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어."라고 말한다. 경희야 동경에서 유학도 했으니 신문에 기고해서 고료도 받을 수 있고 책 번역도 할 수 있고 인생이 안 풀리면 하다못해 가정교사라도 해서 먹고 살 수 있겠지만, 배우지 못했고 가진 기술 없는 그저 부녀자로 살아온 그의 친구에게는 때리는 남편이라도 있어야 굶어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페미니스트로서 각성하지 않았어도 (형용사로서) 페미니스트적인 면모를 많이 갖추고 있는 이들도 있다. 예를 들어, 짧은 머리에 화장 안하고 튼튼한 근육질의 몸을 갖춘 여성 축구 선수를 보자. 그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했든 안했든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먼저, 훨씬 더 많이 외모 코르셋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의 실천을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페미니즘 이론은 1도 모르고 "나이가 차면 결혼해야지!"와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산다면 이 사람은 개념녀인가 페미니스트인가?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긴 머리를 하고 페미니즘 단체에 속해 공부/운동을 하는 나는 개념녀인가 페미니스트인가?

(위의 예시는 이 뮤지컬에서 다룬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예시이지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세상의 여성들은 명예여성과 페미니스트, 이 두 그룹으로 명쾌하게 구분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인 접근보다는, 너무도 공고한 남성중심적 사회에도 어떻게하면 너도 살아 남고 나도 살아 남고 우리 모두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 이걸 고민했으면 좋겠다.

주변 친구들을 개념녀로 대비해 놓으니까 경희, 화영 모두 너무 외로웠다. 나는 그걸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도 일터(연구실)에서 너무 외롭기 때문이다. 경희, 화영 모두 "나는 끝까지 싸워나갈 거야!"라고 하지만, 저들은 정말 잘 싸울 수 있을까, 지지치 않고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여성간의 연대를 보고 싶다. 나는 그만 외롭고 싶다. 나는 이미 일상생활에서 그저 답없는 "개념녀"일 뿐인 친구들보다, 정도는 달라도 어느 정도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함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있다. 나는 일터에서는 너무 외롭지만, 그 일터에서 여자가 나 혼자뿐일 때와, 페미니즘에 어느 정도까지 각성을 했든간에 상관없이 다른 여학생이 한명이라도 더 있을 때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경험했(하고있)다. 여성주의 스터디 모임과 여성 축구 모임에서 같은 것을 꿈꾸며 공부/운동하는 동료들에게서 에너지를 받는다. (사족 : 윗윗윗 문단에 나온 공부/운동에서 운동은 movement고 여기 공부/운동에서 운동은 sportsㅋㅋ) 페미니즘 뮤지컬이라고 간판에 내걸었다면 이런 것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스칼렛 위치에게는 죽을 위기에 처한 순간에 "She's not alone."이라고 위풍당당하게 대사 던지면서 등장해서 도와주는 동료 블랙 위도우와 오코예가 있었듯, 경희/화영에게도 "넌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해주며 함께 걸어나갈 수 있는 (허수아비 남자친구 말고!) 여성 동료가 필요했다. 그리고 they deserved it!

이렇게 길게 비판점들을 썼지만 그래도 나는 이 뮤지컬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마음에 안드는 점들이 많았던 것은 <페미니즘 뮤지컬>이 단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더우먼"이 처음 나왔을 때 기대 만빵해서 봤다가 실망한 점들 쏟아져나왔지만 이제 곧 "캡틴 마블" 나오고 "블랙 위도우" 나오고 더 많은 여성 슈퍼 히어로 영화들이 나오면서 서로서로 부족했던 점들, 다루지 못했던 점들 다루면서 다양한 여성 히어로의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는 것처럼. 뮤지컬과 연극에서도, 더 많은 페미니즘 컨텐츠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니 그 첫 발을 뗀 <모던걸 백년사>에 박수를,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페미니즘 뮤지컬을 만들어 줄 누군가에게도 미리 박수와 응원과 사랑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