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김지영 <페미니즘 감별사의 탄생> 강연 후기

페미니즘 북카페 두잉에서 들었던, 윤김지영 선생님 강연 “페미니즘 감별사의 탄생" 후기 (2018년 2월 24일)

모두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시대가 왔다. 이런 시대에 ‘페미니스트 감별사’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함께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상부 심급’으로서의 역할을 자처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대부분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을 외치는 엘리트 중심주의적 남성들 또는 남성 권력을 모방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페미니스트에게는 도덕적이고 상냥하고 착하고 고결해야 한다는 너무 많은 덕목이 요구된다. 이는 약한 자의 자리가 착함의 자리와 등치 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는 가장 유효한 여성억압의 기제이다. 착함과 상냥함을 남성이 갖지 못한 우월성으로 여기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의 지배윤리다. 이런 지배윤리는 페미니즘의 세계에도 면면이 녹아 들어있다. “페미니스트 여성은 그러면 안 되지!" 같은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려 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 여성이 힘을 확장하려고 시도하면 이기적인 행동이라며 비판한다든지 하는... 이런 세상에서 ‘올바르지 못한 페미니즘’으로 불리는 이들은 약함과 착함의 등치에 의문을 제기하겠다는 이들이다.

페미니즘 감별사는 세 가지 층위로 일어난다. 첫째는 안티페미니스트로 대표되는 이들(남성들). 페미니스트를 몰아내기 위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자처하고 페미니스트를 처단하려는 자들이다. 둘째는 페미니스트 내부에서, 셋째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내부에서 일어난다.

(첫번 째 감별사에 대하여)
남성들은 남성 권력으로 인해 언제든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반면, 여성은 그렇지 않다. 소수자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안 될 것을 요구당한다. “거봐. 이렇게 감정적이니까 차별받지." 같은 말을 듣게 된다. 반면에 남성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약자들에게 물리적 위협이 될 수 있게 때문에 약자가 알아서 파악하고 알아서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착한 페미니즘도 같은 것이다. 남성이 듣기에 불편하지 않은 만큼만 말하는 것. 이런 ‘착한 페미니즘’은 거대한 허상이다.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피씨함은 계속해서 재정의되어야 하고, 피씨함 자체에 대해서 더 치열하게 얘기해야 한다. 상식과 양식(bon sense, bon=good)을 뒤집는 역설로서의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과연 누가, 어느 계급성이 상식과 양식을 정의해왔는지 질문해야 한다. ‘교복의 학생다움’은 한 번도 학생에 의해 정의된 적이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의 상식과 양식은 여성이라는 소수자에 의해 정의된 적이 없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상식과 양식을 뒤엎는 이탈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너무나도 불편하고 너무나도 과격한 것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깃털이 아닌, 고막을 뚫는 비수이다."

여성은 남성을 동일시해왔다. 여성은 발기의 고통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지만 ‘정말 아프고 참기 힘들대’라면서 그 고통에 공감하고 동일시한다. 반면에 여중 여고에서도 ‘너 혹시 그거 있어?’라면서 ‘생리대’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는 것, 모두가 생리통의 고통을 알면서도 생리통을 이유로 체육수업에 빠진 학생을 뒷담화하는 것. 이 모든 서사의 씨실과 날줄은 여성이 남성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남성 중심사회가 만든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이방성의 발톱"이다. 발톱은 안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이타성, 평화, 고결, 순수함 같은 것들을 찢어내기 위한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여성(약자)과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체)은 다르다"고 외치는 것이다.

(두번째 감별사) “메갈리아이라는 유령"
페미니스트 판 안에서도 메갈, 워마드, 터프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는 것은, 나의 순수, 올바름, 이타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이 모든 것들의 첫 출발점은 묻지 않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소리(phones)와 말(logos)을 대조한 개념을 제시하였다. 목소리는 동물의 것으로, 쾌락과 고통만을 표현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것이다. 말은 인간의 것으로, 옳음과 그름 정당함과 부당함을 아는 고차원적인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종 차별적이고 엘리트 중심주의적인 시각을 반영하지만, 페미니즘 판의 대립각의 원인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어느 한 쪽에는 고통과 쾌락의 언어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언어가 고차원적인 것임을 증명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고함을 지르고 고통을 표하는 데서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고통을 표할 권리 자체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그렇게 이끈 것은 가짜 페미니스트로 위치 지어짐으로써 동물의 소음과 같은 목소리로 전락해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자신이 '남혐주의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은 기존 체계의 확장판일 뿐이지 기존 체계를 뒤집을 수 없다. 이렇게 페미니즘 판 안에서 각자의 순수,올바름,이타성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여성들 간의 적대 정치와 분열 통치법, 그러니까 남성에 의한 전형적인 체제 지배 전략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노력을 해서 '말의 자리'를 획득한 페미니스트들은 정말로 말의 자리를 획득한 것일까? 그걸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다. 결정권은 남성권력에 있다. 언제든 그들(남성)의 기분을 거스른다면 손쉽게 박탈당할 수 있는 자리다. 그러면 왜 우리는 그 기준에 의존성을 보이며 분열하는 걸까? 여성이라는 소수자는 헛발질이 용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헛발질을 하면 처단당한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인데, 명심해야 할 점은 발화하지 않는 자는 말의 자리만 빼앗기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도 빼앗긴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사회에서 남 페미니스트들은 과하게 환대받는다. 이는 자기 혐오로서의 여성 혐오다. '준거 표준집단'이 아닌 여성이 '감히' 자기 자신의 담론과 서사를 만드는 일에 불과했던 페미니즘이, 남 페미니스트라는 남성의 인정을 받음을 통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담겨있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노선의 대중성을 키우기 위해(남성을 포함해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문구인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는, 이 문구는 마치 모두에게 같은 억압이 가해지고 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맨박스를 충분히 장착하지 못해서 남성 동성 사회에서 하층 서열에 속하는 이라 할지라도 남성연대에 한데 묶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비싼 룸살롱에 가지 못해서 안마방에 가서 성구매를 하는 남성은, 룸살롱에서 성구매한 남성과 '성구매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남성연대에 묶일 수 있다.) 여성이 받는 억압과 절대 그 크기가 같지 않다. 젠더권력은 굉장히 위계적이고 성별에 따라 억압의 정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걸 지워버리면서 '페미니즘은 모든 위치, 계급에 있는 이들에게 수혜를 발생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체제 유지적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두 번째 오류는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운동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총체적, 보편적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여성혐오적이다. 특수자와 보편자의 자리를 구분하고, 여성만으로는 편파적이고 한계적이기 때문에 보편자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보편과 이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차별에 대한 문제를 더 얹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여성운동이 다른 소수자 정치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약함과 착함의 등치를 내면화한 데서 나오는 생각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에서는 기존 '보편성'의 정의를 폐기하고 새로운 보편성을 정의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존재를 아울러야만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자주 사용되는 문구인 "모든 차별은 차별과 연결된다"는 말은 교차성에 대한 완전한 오독이다. 교차성은 왜 같은 차별 기제 안에서 위계가 발생하는가 질문하는 것이다. (ex 같은 여성이어도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이 경험하는 것이 다름) 권력의 기제가 굉장히 다각적이고 복합적이라는 걸 바라보고 해석하는 게 교차성이 말하려는 것이다. "모든 차별은 차별과 연결된다"가 사실이라면 젠더, 학벌, 인종, 계급 등에 의한 차별이 상호교환되는 동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권력을 단선화하게 된다.

우리는 대신에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는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하기를 요구하는 말이다. 스스로와 불화하고 타자와 불화하며 세계와 불화하는 것, 수혜와 불이익의 배분판을 처음부터 다시 짜려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 감별사)
"래디컬"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진전 속도가 빠름"이라는 뜻이 적혀있다. 이는 완전히 틀린 번역이다. 래디컬은 뿌리, 근간을 말한다. 그러니 래디컬 페미니즘은 근본을 뒤흔들고 처음부터 다시 짜려는 움직임이다. 완전히 판을 뒤엎는 것이기에 속도가 빠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더 많은 저항을 받아서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중장기 전략을 짜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장기전으로 가야 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을 속도로 생각해버리면 속도를 맞추기 위한 생존경쟁이 벌어진다. 대항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취하는 분리주의적 운동(ex 짧은 머리를 하고 비혼을 선언함 등등)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가장 빠른 이들만이 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의 협소화의 조짐이 보인다. 래디컬은 고통과 불유쾌의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야 하는, 인내가 필요한 중장기전이기 때문에 각자 다른 속도와 다른 위치에서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균열을 낼지 연대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Q&A
*첫 번째 감별사적 시선은 내게 큰 타격을 주지 않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감별사적 시선은 내게 타격을 준다. 나도 모르게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스트"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든지... 이런 감별사적 시선에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 그들이 무엇을 위해 감별하려 하는가 질문해야 한다. 남페미들은 그들의 발화 권력에 위협을 느낄 때 터프 사냥을 시작한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커짐으로 해서 그들이 누려왔던 발화 권력이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래디컬을 트랜스 혐오라고 낙인찍으며 그들을 몰아내려 하는 것이다. 터프 사냥을 했던 남페미가 트랜스젠더에겐 온 존재를 내거는 일인 트랜지션을 가지고 농담 따먹기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남페미가 트랜스 친화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반대진영을 쓸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감별사를 자처하는 것이다. 이런 터프라는 낙인이, 래디컬 진영 내에서의 대항적 지점을 분석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해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더 이상 해명하고 증명해보일 거리가 아니고 터프라는 낙인이 생긴 맥락, 터프라는 용어 자체와 그 개념에 대한 허구성을 지적해야 한다.

래디컬 내부에서의 감별사적 시선에 대해서는, 래디컬을 속도전이 아니라고 외치고, 이것은 중장기전이라고 외치고, 나의 앞서감이 나의 우월성과 더 진성임을 보이는 것이 아니며 너의 뒤처짐이 열등함을 뜻하는 게 아니라고 외치면서 각기 다른 속도의 사람들이 손잡고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주변에 공부만 하는 페미니스트들 마음에 안 든다. 윤김지영 선생님 생각은?
여성운동은 공부와 운동이 함께 가야 한다. 책의 세계는 너무 안전하다. 소음이 없고 평온하다. 페미니즘 공부가 실천의 영역과 연계되지 않으면 오히려 역행하는 결과는 낳을 수도 있다. 많이 아는 것과 많이 실천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윤김지영 스스로도 2015년 이전에는 공부만 하던 학자였다고 고백했다. 책의 세계에만 갇혀있는 사람들이 손쉽게 현재의 흐름에 대해 판관적인 글을 쓴다고 했다. 자신은 이미 학자라는 위치성에서 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책의 세계에만 갇히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 SNS를 하는 등 책 바깥의 세계와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 (질문 중 일부) 래디컬은 젠더 폐지론을 지향하는데, 요즘 래디컬 쪽에 FTM과 젠더퀴어가 유입되고 있다. 근데 이들이 "기존 터프는 고인 물"이라면서 래디컬을 다시 차지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답변) (답변 중 일부) 제 3물결로 대표되는 퀴어 진영에서는 기존의 젠더 위계가 젠더가 2개뿐이어서라고 생각하고, n개의 젠더를 통해 젠더 위계를 박탈하려는 노선.
래디컬은 젠더 위계는 젠더에 따라 다르게 물질이 배분되는 사회 구조 때문이라고 주장. 여성이 처한 물질적 몸의 조건을 얘기하려고 한다. 현재 래디컬이 제공해야 하는 것은, 젠더 해체 뒤에 무엇이 오는가 하는 이론적 근간이라고 생각한다.